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우크라이나 관계 (문단 편집) === 고대 === 기원전 7세기 이래 [[고대 그리스]]의 [[그리스인]]들은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여 활발하게 교역한 바 있었다. 흑해 연안에 진출한 그리스인들은 항아리에 담은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판매하고 [[밀]]을 수입하였다. 드니스테르 강 하구 간석지에 티라, [[드니프로 강|드네프르 강]] 하구 간석지에 건설된 올비아, 오늘날 [[세바스토폴]] 근처에 건설된 케르손네소스, [[페오도시야|페오도시아]], 오늘날 [[케르치]]라고 불리는 판티카파이온, 이 외에도 파나고리아, 오늘날 로스토프 인근의 타나이스 등등 [[폴리스]]들이 건설되었다.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역사가 [[헤로도토스]] 역시 올비아에 거주했던 바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남부, 발칸 반도 흑해 연안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세운 유적, 보물들이 많이 발굴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스키타이]]라고 불렀으며 [[드니프로 강|드네프르 강]]을 보리스테네스 강이라고 칭했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스키타이인들과 그리스인들 사이의 교류에 관하여 스퀼레스 왕의 일화를 남긴 바 있다. 스퀼레스의 어머니는 그리스의 폴리스 출신이었으며 아들에게 그리스어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스퀼레스는 왕이 되고 나서도 그리스식 생활을 선호해서 올비아에 자주 찾아갔는데, 그것에서 신하들을 교외에 남겨둔 채 자기는 그리스인들과 어울려 그리스인으로 살았으며, 스키타이인들을 다스릴 때만 스키타이인들에게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스퀼레스가 올비아에 몰래 그리스인 부인을 따로 두고 별개의 가정을 차린 일은 물론 당대 그리스 하층민들의 컬트로 악명 높았던 [[디오니소스]] 신앙에 빠졌다는 점이 알려지자 분노한 스키타이인들은 스퀼레스의 동생을 대신 왕위에 올렸고, 스퀼레스는 고유의 관습을 저버렸다는(왕위 계승권을 꼬이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일화이다.] 종종 크림 반도나 우크라이나의 스키타이족들이 전쟁 포로가 되어 그리스 폴리스에 수입될 때도 있었는데 그리스에서는 스키타이 출신 노예들을 경찰로 활용하였다 한다.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자신들보다 피부가 희고 머리색이 옅다며 이들을 히페르볼레오이(켈트족)와 동류의 하얀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 반도는 식량을 자급하기 쉽지 않았고 이러한 연유로 흑해에서 식량을 지속적으로 수입해와야 했으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상당수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반도와 이오니아를 빠져나가 시리아와 이집트 각지에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그리스 반도의 인구 압력이 감소하였다. 흑해에 잔류한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반도의 폴리스들과 교역 규모가 감소하면서 점차 [[보스포로스 왕국]]같은 자급자족 공동체로 바뀌었다. [[로마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흑해 연안 상당 지역도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한 보스포로스 왕국은 로마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우크라이나 해안지대 서안은 명목상 모이시아 속주(Moesia Inferior)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방어가 힘든 우크라이나 평원지대는 [[사르마티아]], [[고트족]]의 차지였다. 서기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잠시 흑해 북부 평원의 여러 부족집단들을 평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외려 [[체르노젬]] 지대의 고트족들은 [[발렌스]] 황제가 지휘하는 동로마군을 격파한 후 로마 제국 각지를 약탈한 이래 이래 로마 제국의 존망을 끊임없이 위협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